50대 여인의 고백(이것이 인생이구나)
2022. 11. 21. 09:06ㆍ우정
작년 봄이었습니다.
늦은 밤 고속도로를 달리며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한 방송에 주파수를 맞췄습니다.

그 방송은 70ㆍ80년대의 흘러간 가요와 팝송을 조용한 분위기로 틀어주던 방송이라 동일 시간대에 운전할 때면 언제나 틀어놓고 한창 꿈에 젖어 있었을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곤 했었습니다.

졸음을 쫓기 위해 살짝 열어 놓았던 창문을 통해 봄 내음이 상큼하게 밀려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흐르던 음악이 끝나자 여성 진행자의 멘트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께 50대가 되신 세 자녀의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사연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평소에는 쾌활하던 여성 진행자의 목소리가 낮고도 살짝 떨리는 듯 사연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심코 듣고 있던 제 마음도 그 진행자의 목소리를 따라 깊은 곳에서부터 진동해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평범하게 듣고 있기에는, 사연을 보낸 그 여인의 인생을 정리하는 듯한 마음이 물결 하나 일지 않는 잔잔한 바다처럼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모두 성장하여 시집을 간 세 딸아이의 엄마입니다. 오늘 그이의 묘소를 다녀오며 불현듯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딸아이들과 동행할 수도 있었지만 조용히 그이가 누워 있는 묘 앞에 앉아 지나온 날을 생각하며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그이를 처음 만난 지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이와 저는 나이 차이가 많았기 때문에 저에게 그 사람은 언제나 어려운 상대였습니다. 그이를 존경하고 사랑하면서도 제 마음을 내놓고 표현하지 못했었습니다. 신혼 때에는 철이 없었는지 부족한 생활에서도 모든 것이 좋게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저에게는 불행이라는 낱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게 시간은 빨리 흘러갔던 것 같습니다.

아이가 생겼고 딸 둘을 낳았습니다. 미안해하는 저를 보고 그이는 오히려 괜찮다고 하며 위로해주기도 했었습니다. 세 번째 아이를 가졌을 때, 그이는 장기간 지방으로 출장을 떠났습니다.

가끔씩 찾아오는 그 사람이 반갑기만 했었고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궁금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이가 해주는 말이 저에게는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셋째 아이를 낳게 되었고 그 아이도 딸이었습니다. 갓난아이를 키우며 오랜 시간 오지 않던 그이가 궁금하여 아이 둘은 친정에 맡기고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그 사람이 있는 지방을 찾아갔습니다.

수소문해 찾은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제 인생은 다른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마루에 앉아 있던 그 사람의 품안에는 우리 아이와 비슷한 나이의 아기가 안겨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떻게 돌아왔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 후로 저는 세 딸아이와 함께 스스로 생활을 해결하며 고생을 참고 살아왔습니다.
이 일 저 일을 마다 않고 하며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엄마의 걱정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딸아이들은 착하게 자라 모두 성인이 되었습니다. 어렵게 자리를 잡고 세 아이를 모두 짝을 지어 시집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얼굴엔 병색이 완연하여 집을 찾아왔습니다. 성장한 아이들은 아버지인 그 사람을 냉정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아이들의 아버지인 그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원엘 가자고 다그치자 그 사람은 병원에서 더 이상 방법이 없어 나온 길이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한달 후,
그 사람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을 치르기 전날 밤, 한 청년이 영안실에 찾아와 슬피 울며 밤을 새웠습니다. 저는 그 청년이 누군지 알 수 있었습니다. 밤새 울다 새벽에 떠나던 그 청년에게 저는 아무 말도 하질 못했습니다.

오늘은 장미 꽃 한 송이를 들고 그이의 묘를 다녀왔습니다. 창 밖으로 보이는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유롭게만 보였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니 어느덧 50대의 중년부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시집 간 딸아이들을 부름이 없이 앞으로도 생각이 날 때면 그 사람의 묘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
사연을 들어가면서 저는 '이것이 인생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길 자제하면서 담담하게 써 내려간 그 여인의 마음에서 오히려 표현하지 못하는 깊은 한을 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순수했던 사랑이 미움과 절망으로, 그것이 또다시 승화된 사랑으로 변화되어간 그 여인의 인생에서 느꼈던 당시의 마음은, 시간이 흘러도 아직까지 생생하게 제 마음 속에 남아있습니다.

사연을 읽어 내려가며 가느다랗게 떨려오던 진행자의 목소리에서,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옮겨내듯 담담하게 써 내려간 그 여인의 글에서, 힘들었던 고통을 승화시키는 내면의지의 숭고함을 느끼며, 그 여인이 진실로 남편을 사랑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금모래의'강변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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